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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념비보다 희생의 무게로 다가온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을 걷다가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에 도착했다. 링컨기념관과 워싱턴기념탑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넓은 광장과 분수, 화강암 기둥이 조화를 이루며 웅장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앙의 레인보 풀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힘차게 솟아올랐고, 수면 너머로는 워싱턴기념탑이 곧게 서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분수 주변을 거닐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이 장소가 기억하는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과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었고,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의 생명과 일상을 빼앗아 간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기념관 양쪽에는 대서양 전선과 태평양 전선을 상징하는 두 개의 거대한 승리 아치가 세워져 있다. 광장을 둘러싼 56개의 화강암 기둥은 당시 미국의 48개 주와 여러 자치령 및 영토를 나타내며, 각각의 기둥에는 청동으로 만든 화환이 걸려 있다. 기둥들을 하나로 연결한 굵은 청동 밧줄은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군인과 국민, 산업과 농업, 전선과 후방이 힘을 모았던 단결을 상징한다. 입구 양편에 설치된 24개의 청동 부조에는 군인의 입대와 훈련, 전투, 부상자 치료뿐 아니라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전쟁 물자를 준비한 민간인들의 모습도 새겨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1,600만 명의 미국인이 군에 복무했으며, 국내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
기념관 서쪽의 ‘자유의 벽’에는 4,048개의 금빛 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별 하나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인 100명을 상징하며, 그 아래에는 “여기에 우리는 자유의 대가를 새긴다”는 뜻의 문구가 놓여 있다. 반짝이는 별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장식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알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별 하나마다 100명의 삶과 가족의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념관은 전쟁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한 장소라기보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인류가 치러야 했던 엄청난 희생을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끝난 전쟁을 기념하는 장소에서 떠올린 오늘의 전쟁들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의 분수 앞에 서 있으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낳는지 충분히 경험했는데, 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총성과 폭발음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전쟁이 끝난 뒤 국제연합을 만들고 국가 간의 분쟁을 대화와 국제법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이 전쟁과 무력충돌 속에서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떠나고 있다. 기념관 중앙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물줄기와 평화롭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시간 어딘가에서는 공습경보를 듣고 지하 대피소로 달려가는 사람들과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국제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전쟁 외에도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내전과 무장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진 전쟁은 언론에 보도되는 횟수가 적고 피해 상황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지만, 그곳의 생명 역시 똑같이 소중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슬픔은 같고,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의 절망도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은 과거 전쟁의 종료를 기념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오늘의 전쟁들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장소였다.
전쟁을 기억하는 목적은 또 다른 전쟁을 막는 데 있다
전쟁기념관을 세우고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승리한 나라의 힘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기념관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에서 죽음이 쏟아지지 않고, 바다는 전함이 아닌 무역선을 품으며, 세계가 평화를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줄어들고, 전쟁은 책과 영상 속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래서 실제 전쟁의 희생을 보여주는 기념관과 기록이 필요하다. 기억이 사라지면 정치적 욕심과 영토 분쟁, 민족과 종교의 갈등이 다시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힘 있는 국가와 지도자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대방을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상, 중재와 국제법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국가안보와 자위권이 중요하더라도 민간인의 생명과 기본적인 생활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병원과 학교, 주거지역을 공격해서는 안 되며, 전쟁포로와 피란민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전쟁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는 분쟁과 난민의 고통에도 지속적으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무기를 더 많이 보내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완성할 수 없으며, 결국 적대관계를 끝내는 정치적 용기와 끈질긴 외교가 필요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평화를 만드는 출발점은 서로의 생명과 존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른 민족과 종교,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가짜뉴스와 증오를 퍼뜨리지 않으며, 전쟁 피해자와 난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평화를 위한 행동이다. 대한민국 역시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고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나라로서, 분쟁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국제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을 떠나며 마음속에 한 가지 소원을 간직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을 비롯한 중동에서, 그리고 뉴스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세계의 모든 전쟁터에서 하루빨리 총성이 멈추기를 바란다. 분수 주변을 자유롭게 걷던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일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