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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델발트의 설산을 떠나 취리히로 향한 길

 

며칠 동안 머물며 아이거 북벽과 융프라우요흐, 피르스트와 바흐알프제를 돌아본 그린델발트를 떠나 취리히로 향했다. 그린델발트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창밖으로 웅장한 설산이 보이고, 조금만 걸어도 푸른 초원과 목조주택을 만날 수 있는 평화로운 산악마을이었다. 맑은 날 피르스트에서 바라본 알프스와 하늘을 수놓은 패러글라이더, 아직 얼어 있던 바흐알프제까지 여행의 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특히 전날에는 강한 햇볕 아래에서 네 시간 이상 하이킹을 한 탓에 팔에 일광화상까지 입었지만, 그린델발트에서 경험한 대자연은 그런 불편함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제는 산과 계곡을 뒤로하고 스위스 최대 도시인 취리히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과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가 동시에 밀려왔다.

열차가 그린델발트 계곡을 빠져나가자 창밖 풍경도 서서히 달라졌다. 가까이 다가와 있던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조금씩 멀어졌고, 좁은 계곡과 초원은 점차 넓은 들판과 도시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린델발트에서는 자연이 모든 풍경의 중심이었다면 취리히에 가까워질수록 철도와 도로, 주택과 업무용 건물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취리히에 도착하니 세계적인 금융도시답게 역 주변은 사람과 트램으로 활기가 넘쳤다. 등산복을 입은 여행객부터 바쁜 걸음으로 이동하는 직장인까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조용한 산악마을에서 대도시로 이동했지만 취리히에는 복잡함 속에서도 질서와 여유가 느껴졌다.

오전부터 이어진 이동을 마친 뒤 오후에는 무리하게 여러 관광지를 찾아다니기보다 취리히의 분위기를 천천히 느껴 보기로 했다. 높은 산을 오르고 오랜 시간 하이킹했던 일정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날은 호숫가를 산책하며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리히의 중심을 흐르는 리마트강을 따라 걷자 오래된 건축물과 교회의 첨탑이 보였고, 강물이 취리히호와 만나는 방향으로 갈수록 시야가 넓어졌다. 그린델발트에서는 고개를 들어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면 취리히에서는 수평으로 길게 펼쳐진 물과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같은 스위스 안에서도 산악마을과 호수도시가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한스 발트만 기마상이 있는 뮌스터교 부근으로 향했다.

 

 

뮌스터교에서 만난 취리히의 역사, 한스 발트만 기마상

 

 

취리히 구시가지를 지나 뮌스터교 부근에 도착하자 말을 타고 당당하게 앉아 있는 한스 발트만의 청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리마트강과 프라우뮌스터 교회가 가까운 슈타트하우스콰이에 세워진 이 기마상은 중세 취리히의 역사와 권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동상 속 인물인 한스 발트만은 1435년에 태어나 군사 지휘관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1476년 부르고뉴 전쟁에서 스위스 동맹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1483년 취리히 시장으로 선출되어 당시 스위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지만, 강력한 개혁정책과 권력 행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농민과 시민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1489년에 처형되었다. 승리한 군인이자 시장으로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정치적 갈등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그의 생애는 한 사람의 영광과 몰락을 함께 보여준다. 


현재의 기마상은 스위스 조각가 헤르만 할러가 제작했으며, 1937년에 세워졌다. 청동으로 만든 말과 인물은 높고 묵직한 석조 받침대 위에 자리하고 있어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말을 탄 한스 발트만은 앞을 바라보며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의 복잡한 역사를 알고 바라보면 단순한 영웅의 동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한 시대에는 승리한 지휘관과 강력한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인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권력을 지나치게 행사한 통치자로 기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기념물은 과거의 인물을 무조건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살아간 시대와 당시 사회의 갈등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리히시의 공공미술 자료에 따르면 이 작품은 뮌스터교 인근 슈타트하우스콰이에 있으며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동상 주변에는 리마트강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가까이에는 프라우뮌스터와 그로스뮌스터를 비롯한 취리히의 역사적인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어,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오랜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강 위를 오가는 배와 다리를 건너는 트램,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의 모습은 중세의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과 현대 도시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스 발트만 동상 앞에 서서 사진을 촬영한 뒤 다시 호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짧은 산책길이었지만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취리히가 아름다운 금융도시일 뿐 아니라 수많은 정치적 변화와 갈등을 지나온 역사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취리히호의 가니메데 조각상에서 마무리한 평화로운 하루

 

 

한스 발트만 동상을 지나 리마트강이 취리히호와 만나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도시의 풍경이 한층 넓고 여유롭게 바뀌었다. 호숫가의 뷔르클리 광장과 뷔르클리 테라스 주변에는 산책을 즐기는 시민과 관광객이 많았으며, 호수에는 크고 작은 배와 요트가 떠 있었다.  짙고 푸른 하늘 아래 잔잔한 호수가 멀리까지 이어졌고, 수면 너머로는 완만한 산줄기가 펼쳐졌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 가족이나 연인과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게 다가왔다. 그린델발트의 설산이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함을 보여주었다면 취리히호는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쉬게 하는 넉넉함을 지니고 있었다.

호숫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바라본 작품은 가니메데 조각상으로  한 팔을 하늘로 높이 뻗은 젊은이와 그 옆의 독수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니메데는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트로이의 젊은이로, 독수리의 모습으로 나타난 제우스에 의해 올림포스로 올라가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취리히호의 가니메데는 스위스 조각가 헤르만 후바허의 작품으로, 1952년 뷔르클리 테라스에 설치되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인물의 자세는 독수리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는 듯하면서도, 더 높은 세계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푸른 호수와 열린 하늘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어 조각의 동작과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가니메데의 뻗은 팔을 바라보니 전날 피르스트에서 보았던 패러글라이더와 대학 시절 행글라이더를 탔던 기억도 다시 떠올랐다. 알프스의 하늘을 날던 사람들처럼 조각 속 가니메데 역시 땅을 벗어나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여행 중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만난 장면들이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는 것 같아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스 발트만 기마상이 취리히의 역사와 권력, 영광과 몰락을 생각하게 했다면 가니메데 조각상은 자유와 동경,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인간의 꿈을 떠올리게 했다.

호숫가 난간에 서서 천천히 움직이는 배와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날은 유명 관광지를 바쁘게 찾아다니거나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이동하지 않았다. 그저 취리히호 주변을 걷고, 동상 앞에서 잠시 멈추고,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과 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오히려 취리히라는 도시를 더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그린델발트의 웅장한 대자연을 떠나온 아쉬움은 호수의 잔잔한 풍경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알프스의 설산에서 시작된 여행의 하루는 한스 발트만의 역사와 가니메데의 신화를 지나 취리히호의 평화로운 저녁 풍경 속에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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