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파크 숙소를 떠나 테턴산맥과 잭슨을 향한 길
2022년 7월 15일, 아이다호주 아일랜드파크의 4220 S Big Springs Loop Road에 있는 숙소에서 여행 3일 차를 시작했다. 전날까지는 옐로스톤 국립공원 북부의 매머드 핫스프링스와 화석나무, 높은 산과 폭포 등을 둘러보았고, 이날의 목적지는 와이오밍주에 있는 그랜드티턴 국립공원과 제니레이크였다. 아일랜드파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울창한 침엽수림과 넓은 초원, 멀리 솟은 산봉우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도로는 산과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졌고, 지역에 따라 완만한 들판과 거친 바위산의 풍경이 교차했다. 우리가 ‘테일러산’이라고 기억했던 산악 구간은 정확한 지점을 특정하기 어렵지만, 이날 여정에서 중심이 된 거대한 산줄기는 테턴산맥이었다. 평지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듯한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가까워질수록 그랜드티턴에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잭슨을 지나면서 2019년 미국 동부와 남부를 여행했던 기억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당시 올랜도를 향해 이동하며 머물렀던 곳은 와이오밍주의 잭슨홀이라기보다 이름이 비슷한 플로리다주의 잭슨빌로 기억을 정리하는 것이 지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그곳에서는 나뭇가지 아래로 길게 늘어진 회색빛의 스패니시모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름에 ‘모스’가 들어가지만 일반적인 이끼와는 다른 파인애플과의 착생식물로, 나무에서 영양분을 빼앗기보다 공기와 빗물에서 필요한 수분과 양분을 얻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긴 줄기가 흔들리는 모습은 남부 특유의 따뜻하고 습한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여행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잭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스패니시모스가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러나 지금 달리고 있는 와이오밍주의 잭슨과 잭슨홀은 플로리다의 잭슨빌과 전혀 다른 자연환경을 보여 주었다. 스패니시모스가 드리워진 습하고 온화한 남부의 숲과 달리, 이곳에는 높은 산과 침엽수림, 넓은 고산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잭슨은 도시 이름이고, 잭슨홀은 테턴산맥과 그로방트르산맥 사이에 형성된 넓은 계곡을 뜻한다. 같은 미국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식생과 기후, 산의 형태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2019년의 기억과 2022년의 풍경이 ‘잭슨’이라는 이름을 통해 연결되면서 여행은 장소를 이동하는 일인 동시에 과거의 경험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는 제니레이크였지만, 그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지역의 자연과 추억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크레이그 토머스 방문자센터

잭슨을 지나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차량이 많이 세워진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계획만 생각했다면 제니레이크를 향해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차를 돌려 들어갔다. 그곳은 무스 지역에 자리한 크레이그 토머스 디스커버리 앤드 비지터 센터(Craig Thomas Discovery and Visitor Center)였다. 커다란 창을 통해 테턴산맥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된 방문자센터에는 공원의 지형과 야생동물, 인간의 역사와 자연환경을 소개하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도와 탐방 정보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단순히 아름다운 산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의 산봉우리들은 수평선처럼 완만하게 이어지기보다 평원에서 급격하게 솟아올라 더욱 웅장해 보인다. 테턴산맥은 지각의 단층운동으로 한쪽 지층이 올라가고 반대쪽이 내려가면서 형성되었으며, 이후 빙하의 침식작용이 깊은 계곡과 날카로운 봉우리를 다듬었다. 산 아래의 호수들도 과거 빙하가 이동하며 땅을 파내고 퇴적물을 쌓은 과정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형성 과정을 알고 창밖의 봉우리들을 다시 바라보니 바위산의 거친 윤곽과 골짜기에 남은 눈, 산 아래의 숲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오랜 지질 변화의 결과로 다가왔다. 방문자센터는 관광객이 잠시 쉬어 가는 건물에 그치지 않고, 눈앞의 풍경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주는 여행의 안내서와 같은 곳이었다.
여기에서 공원 지도를 살펴보고 이동하던 중 태거트 레이크 트레일헤드(Taggart Lake Trailhead)를 만났다. 제니레이크가 원래 목적지였기에 또 다른 산책로를 걸을 계획은 없었지만, 트레일 입구와 주변 풍경을 보자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안내판에는 태거트 호수를 왕복하는 비교적 접근하기 좋은 코스와 산악지역에서 지켜야 할 안전수칙이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 속 안내에 따르면 태거트 호수까지 갔다가 같은 길로 돌아오는 기본 코스는 약 3마일, 우리 거리로 약 4.8킬로미터 정도이며, 예상 시간은 약 2시간이다. 짧아 보이더라도 고도가 높은 자연지역이므로 물과 모자, 자외선 차단제 등을 준비하고 야생동물과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주차 차량이 많다는 작은 호기심이 방문자센터 관람으로 이어졌고, 다시 그것이 태거트 호수 산행이라는 새로운 일정으로 연결되었다. 계획에 없던 장소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기대감은 더 커졌다. 여행지에서 모든 일정을 미리 결정해 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현장에서 발견한 표지판과 사람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제니레이크로 서둘러 가려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태거트 레이크 트레일을 걷기로 했다. 그 선택은 이날 여행에서 가장 고마운 우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숲길 끝에서 만난 태거트 호수

태거트 레이크 트레일에 들어서자 가까운 도로와 주차장의 소리는 점차 멀어지고 나무와 바람이 만드는 조용한 세계가 펼쳐졌다. 산책로 주변에는 빽빽한 침엽수와 낮은 관목이 자라고 있었고, 숲 바닥에는 쓰러진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었다. 일부 구간에서는 가늘고 어린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솟아 있었는데, 이 일대가 과거 산불을 겪은 뒤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내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불에 타거나 고사한 나무를 모두 치우지 않고 숲의 순환 과정으로 남겨 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쓰러진 나무는 곤충과 작은 동물의 보금자리가 되고, 부식된 뒤에는 새로 자라는 나무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한다. 사람의 눈에는 정리되지 않은 숲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연에는 그 자체의 질서와 회복 방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길을 걸을수록 테턴산맥의 거대한 암봉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빛 바위봉우리와 짙은 초록색 숲, 경사면에 남은 흰 눈이 겹쳐진 풍경은 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강렬했다. 산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크기와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작은 사람이 거대한 바위산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자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 작음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거대한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숨이 조금 차고 다리가 무거워질 때도 있었지만, 숲 사이로 보이는 봉우리가 우리를 계속 앞으로 이끌었다.
마침내 나무 사이로 맑고 잔잔한 태거트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건너편에는 테턴산맥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솟아 있었고, 짙은 초록빛 물 위로 산과 구름의 모습이 은은하게 비쳤다. 제니레이크만을 생각하며 출발했던 우리에게 태거트 호수는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유명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계획에 없던 길을 선택하고 땀을 흘리며 걸었기에 호수의 고요함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물가에 서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와 잔물결을 바라보니 이동하는 동안 쌓였던 피로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사진 속 호수는 조용하지만, 그 장면을 마주한 마음속에는 감사와 환희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2019년 남부 여행에서 보았던 스패니시모스, 2022년 옐로스톤의 간헐천과 화석나무, 그리고 이날 만난 테턴산맥과 태거트 호수는 모두 미국이라는 한 나라 안에 존재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습한 남부의 착생식물에서 고산지대의 침엽수와 빙하가 만든 호수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다채로움은 내가 상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제니레이크가 이날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길을 가다 우연히 들어간 방문자센터와 예정에 없던 태거트 호수가 더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날의 경험은 여행의 가치를 목적지를 몇 곳 방문했는가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차가 많이 세워진 주차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작은 선택이 새로운 지식과 산행, 아름다운 호수로 이어졌다. 미국의 자연은 이름난 명소 한두 곳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다채로웠으며,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계획 밖에서도 놀라운 풍경을 내어 주었다. 태거트 호수 앞에서 느낀 경외감은 웅장한 산의 크기뿐 아니라 산불 뒤에 다시 자라는 숲, 빙하가 남긴 물길, 그 환경을 보호하며 이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함께 비롯되었다. 제니레이크로 향하던 길에 만난 뜻밖의 행운은 ‘좋은 여행은 정해진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만이 아니라, 가는 길에서 발견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남겼다. 태거트 레이크 트레일 공식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