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이 활짝 핀 가로수를 따라 요새로

바하마 낫소항에서 시내 관광을 시작해 포트 핀캐슬로 향하는 길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도로 양쪽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가로수였다. 굵고 구불구불한 가지가 도로 위까지 넓게 뻗어 자연스러운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초록색 잎 사이에는 붉은색과 주황색 꽃이 불꽃처럼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햇빛을 받은 꽃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진 꽃잎들이 도로 가장자리와 보도 위를 붉게 물들였다. 차량 창문에도 꽃과 나뭇가지가 비쳐 이동하는 길 전체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 푸른 바다와 흰 모래사장으로만 생각했던 바하마에서 이렇게 울창하고 아름다운 꽃길을 만나니 낫소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것 같았다.
꽃이 핀 거리를 지나 베넷스 힐 방향으로 올라갈수록 바닷가의 밝고 여유로운 풍경과는 조금 다른 역사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낮은 건물과 야자수 사이로 언덕이 이어졌고, 높은 지대에 오르자 낫소 시내와 항구가 점차 넓게 내려다보였다. 과거에는 이 길을 따라 군인과 물자, 무기가 요새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에는 관광객을 태운 차량과 주민들의 자동차가 오가고, 아름다운 꽃이 사람들을 맞이하지만 수백 년 전에는 외부의 침략과 해적의 접근을 경계하는 긴장된 길이었을 것이다. 붉은 꽃이 핀 평화로운 거리와 언덕 위의 오래된 요새가 서로 대비되면서 낫소가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이야기를 품은 도시라는 사실을 느끼게 했다. 아름다운 가로수길은 포트 핀캐슬의 무거운 역사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난 밝고 따뜻한 서문과 같았다.
항구를 향한 대포와 배를 닮은 포트 핀캐슬

언덕 위에 자리한 포트 핀캐슬(Fort Fincastle)에 도착하자 두꺼운 석회암 성벽과 항구를 향하고 있는 오래된 대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니 초록빛 나무와 붉은 꽃이 핀 거리, 낫소의 낮은 건물들이 발아래 펼쳐졌고, 그 너머에는 대형 크루즈선 여러 척이 항구에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포신이 향하는 방향과 현대의 크루즈선이 한 장면에 들어오니 과거의 군사시설과 오늘날의 관광산업이 서로 마주 보는 듯했다. 과거에는 적의 군함과 해적선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올랐겠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같은 자리에서 낫소항의 평화로운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포트 핀캐슬은 1793년 바하마 총독이었던 존 머레이, 즉 던모어 경이 낫소와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다. 현장의 안내판에는 던모어 경의 두 번째 작위가 ‘핀캐슬 자작’이었기 때문에 요새에 포트 핀캐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또 다른 안내판에서는 이 요새의 독특한 형태를 ‘Shipshape’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위에서 바라보면 한쪽 끝은 뾰족한 배의 선수처럼 보이고, 반대쪽은 외륜선의 둥근 선미를 닮아 낫소의 다른 요새와 구별된다. 중앙에는 돛대처럼 보이는 깃대를 설치해 주변의 요새나 선박과 신호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여러 대의 대포와 곡사포가 배치되었지만, 실제 침략자를 향해 발사된 기록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을 위해 세워진 요새가 큰 전투를 겪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후 포트 핀캐슬은 높은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 등대와 신호탑 역할도 담당했다.
감옥처럼 느껴진 어두운 석실과 섬 수비대의 고단한 생활
포트 핀캐슬 내부로 들어가자 밝은 햇빛이 쏟아지던 성벽 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낮고 둥근 천장은 작은 석회암을 촘촘히 쌓아 만들었고, 벽에는 오랜 세월 동안 습기와 바닷바람이 남긴 녹색과 검은색 흔적이 가득했다. 작은 창과 좁은 출입구, 두꺼운 돌벽 때문에 처음에는 죄수를 가두었던 감옥이나 지하 감방처럼 느껴졌다. 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잠시 서 있으니 과거 이곳에 갇힌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현장의 안내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진 속 공간은 포트 핀캐슬과 던모어 경, 요새의 구조, 그리고 이곳을 지켰던 서인도연대 병사들의 생활을 설명하는 전시공간이었다.
‘Life of an Island Soldier’라는 안내판에는 낫소의 요새를 지켰던 병사들의 생활이 전투보다 고된 노동에 가까웠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뜨거운 열대의 햇빛 아래서 행군하고 소총을 장전하는 훈련을 반복했으며, 단단하고 보관성이 좋은 건빵과 제한된 식량으로 생활했다. 포트 핀캐슬이 실제 공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하루는 위험하기보다는 단조롭고 고단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여행 당시에는 내부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죄수를 가두었던 성으로 기억했지만, 자료를 확인하면 포트 핀캐슬은 방어 요새와 병사들의 주둔지, 등대와 신호소 역할로 설명된다. 낫소에서 지하감옥과 죄수 수용공간으로 잘 알려진 곳은 별도의 요새인 포트 샬럿이다. 이 차이를 알고 나니 사진 속 석실은 감옥이라기보다 섬을 지켜야 했던 군인들의 고립되고 엄격한 생활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붉은 꽃이 핀 평화로운 거리에서 출발해 대포와 성벽, 어두운 석실까지 둘러본 포트 핀캐슬 여행은 바하마의 아름다운 자연 뒤에 숨은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하늘 높이 솟은 워터타워
포트 핀캐슬 바로 옆에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원통형의 워터타워가 자리하고 있었다. 흰색 탑은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높고 웅장했으며, 둥근 상부와 세로로 길게 이어진 기둥 구조가 낫소의 푸른 하늘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워터타워는 1928년 낫소의 수압을 유지하고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군사 방어를 위해 세운 18세기 요새 옆에 도시의 생활용수를 담당한 20세기 시설이 나란히 서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쪽의 대포와 성벽은 침략과 전쟁에 대비했던 시대를 보여주고, 다른 한쪽의 높은 탑은 도시의 성장과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했던 근대 시설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붉은 꽃이 핀 평화로운 거리에서 시작해 오래된 요새와 대포, 낫소항을 내려다보는 전망과 워터타워까지 둘러본 이번 일정은 바하마의 자연뿐 아니라 역사와 생활의 흔적까지 만나는 시간이었다. 전쟁을 준비했던 돌성 위에 평화로운 관광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한 여행의 의미로 남았다.